들어가며: ‘저성장’은 운명인가, 정책의 결과인가
‘저성장’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한국 경제를 설명하는 상투어가 됐다.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대외 환경의 급변, 기술 경쟁의 격화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상황에서 체감되는 불안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2026 경제학 공동학술대회 기조연설에서 제시된 관점은 비관의 반복이 아니라 “사람과 기술에 대한 투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산업정책”이라는 명료한 처방으로 요약된다.
이 글에서는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의 기조연설 핵심을 바탕으로,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이 왜 중요한지, 어떤 위험이 있으며,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2% 잠재성장률을 20~30년’이라는 목표가 현실적 경로가 될 수 있는지 정리해본다.
기조연설 핵심 요약: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이 성장의 열쇠
기조연설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하다. 한국의 저성장은 적절한 정책으로 벗어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다음 문장이 논지를 선명하게 만든다.
- “사람과 기술에 대한 투자를 통한 적절한 정책으로 저성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 “그렇게 하면 2% 정도의 잠재성장률로 20~30년 이상을 끌고 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AI를 도입하면 성장한다’는 단선적 주장이 아니라, AI와 인적 자본이 결합할 때 선순환이 발생한다는 구조적 주장이다. 즉, 기술은 그 자체로 성장을 보장하지 않고, 기술을 흡수·확산·혁신으로 연결하는 사람(인적 자본)과 제도(거버넌스, 산업정책)가 결정적이라는 관점이다.
한국 경제의 위협 요인: 내부 구조와 외부 충격이 동시에 온다
1) 고령화와 생산가능인구 급감

한국이 마주한 가장 큰 내부 요인은 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다. 노동 투입이 줄어드는 국면에서 성장률을 유지하려면 선택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 노동을 대체·보완하는 생산성 혁신(특히 AI 기반 자동화 및 의사결정 고도화)
- 노동의 질을 끌어올리는 인적 자본의 업그레이드(교육·훈련·재교육 체계)
기조연설이 AI와 인적 자본을 “두 축”으로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구가 줄어드는 구조 자체는 단기간에 바꾸기 어렵지만, 생산성과 역량의 향상은 정책 선택으로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2) 보호무역 강화와 글로벌 불확실성
대외 요인으로는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 강화 기조가 언급됐다. 보호무역이 강화될수록 수출 주도형 경제는 다음과 같은 위험에 노출된다.
- 관세·규제·보조금 경쟁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악화
- 공급망 재편으로 인한 생산 거점 이동 및 투자 불확실성 확대
- 기술·안보 이슈로 인한 시장 접근 제한
3) 미·중 동시 의존 수출 구조의 취약성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한국의 수출이 미국과 중국에 동시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양국 갈등이 심화될수록 “어느 쪽에도 완전히 설 수 없는” 전략적 제약이 커진다. 따라서 중장기적으로는 단순 시장 다변화를 넘어, 고부가가치화와 기술 기반의 경쟁력 강화가 필수가 된다.
이때 AI는 단순한 생산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제품·서비스의 지능화, 연구개발 효율화, 품질관리·공급망 최적화 등 수출 경쟁력의 핵심 레버로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를 가능케 하는 토대는 인적 자본이다.
AI와 인적 자본의 선순환: ‘사람이 기술을 만들고, 기술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기조연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AI와 인적 자본이 결합해 선순환을 이룬다”는 설명이다. 다음 연결고리가 핵심이다.
- 좋은 인적 자본 → R&D 역량 확대 → 기술 혁신 촉진
- AI의 생산성 향상 과정 → 경제정책 혁신 및 R&D 효율성 제고
이를 현실의 기업과 산업 현장에 대입하면, 선순환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 숙련된 인력이 많을수록 AI 프로젝트의 성공률이 올라간다(데이터 이해, 문제정의, 모델 검증).
- AI가 반복 업무를 줄이면, 인력은 더 고차원 업무(설계·실험·전략·창의적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
- 그 결과 R&D 속도가 빨라지고, 신제품/신공정의 혁신이 누적되며, 산업의 총요소생산성이 개선된다.
즉, AI는 ‘생산성의 엔진’이 될 수 있지만, 엔진을 가동하고 유지·보수하는 것은 인적 자본이다. 이 관점이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을 단순 유행어가 아니라 성장전략으로 만드는 논리적 기반이다.
대학 교육의 질적 고도화: 문제정의와 비판적 사고가 경쟁력
1)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적 자본 발전에서 기조연설이 찍은 핵심은 대학 교육의 질적 고도화다. 특히 “문제를 정의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언급은 현재의 교육과 노동시장 미스매치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지식은 검색과 AI 도구로 빠르게 접근할 수 있지만, 다음 역량은 여전히 사람의 경쟁력으로 남는다.
- 문제를 쪼개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정의 능력
- 가정과 데이터의 한계를 검증하는 비판적 사고
- 타 분야와 연결해 해법을 설계하는 융합적 사고
- 이해관계자를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과 협업
2) 교육과정 개편의 방향

AI 시대의 교육 개편은 ‘코딩 과목을 늘리자’ 수준에서 끝나선 안 된다.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전 국민의 생산성 기반을 높이는 것이므로, 대학과 직업교육은 다음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 전공 불문 데이터 리터러시(통계·실험·해석) 강화
- 산업 현장 문제를 다루는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 확대
- 실패 경험을 학습으로 전환하는 실험 문화 조성
- 졸업 후에도 재학습이 가능한 평생교육·마이크로크레덴셜 체계
결국 인적 자본은 ‘학위’가 아니라 ‘역량의 축적’이며, 정책은 그 축적 경로를 매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AI 혁신의 거버넌스: 도입·학습 비용을 어떻게 낮출 것인가
기조연설은 AI 혁신을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문제’로도 보았다. 특히 기업과 근로자가 AI를 도입하고 학습하는 부담을 완화하는 정책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다.
1) 기업의 부담: 투자 불확실성과 전환 비용
AI 도입은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문제가 아니다.
- 데이터 정비, 보안, 인프라 구축 비용
- 현업 프로세스 재설계(BPR)
- 성과 측정 체계 구축(KPI/OKR 재정렬)
- 법·규제 리스크(개인정보, 저작권, 책임소재)
이런 비용 때문에 특히 중소·중견기업은 “도입하고 싶은데 못 하는” 상태에 머무르기 쉽다.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은 기술 확산의 병목이 어디인지(데이터, 인력, 자금, 규제)를 진단하고, 맞춤형으로 막힘을 뚫는 접근이 필요하다.
2) 근로자의 부담: 학습 비용과 전환 리스크

근로자 입장에서 AI는 기회이자 불안이다. 새로운 도구를 익히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 업무 재편으로 인한 역할 변화는 개인에게 리스크로 다가온다. 따라서 정책은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 학습 시간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 전환 과정에서 소득과 고용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 기업 내부의 AI 교육을 어떻게 표준화·인증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 지원금이 아니라, 재교육의 품질과 노동 이동의 안전망이다. 그래야 AI가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적 저항을 줄이며 확산될 수 있다.
산업정책의 원칙: 과잉보호의 역효과를 피하려면
기조연설은 산업정책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경고를 던졌다. 바로 “산업을 과잉보호하면 생산성이 오히려 저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책이 실패하는 전형적 경로를 정확히 짚는다.
1) 성과 연동 지원: ‘지원’보다 ‘검증’이 중요하다
정책 지원이 지속되면 기업은 혁신보다 보조금 최적화에 집중할 유인이 생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설계다.
- 성과지표를 사전에 명확히 정의(생산성, 수출, 고용의 질, R&D 성과 등)
- 단계적 지원(마일스톤 달성 시 다음 단계)
- 실패 프로젝트의 교훈을 남기는 평가·피드백 체계
즉,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은 ‘돈을 쓰는 정책’이 아니라 ‘성과를 학습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2) 투명성: 정치와 결합할 때 생기는 왜곡을 막는 장치

또 하나의 핵심은 투명성이다. 정책 집행이 불투명하면 정치적 개입과 지대추구가 발생하고, 그 결과 혁신이 아니라 특혜 경쟁이 생긴다. 따라서 정책은
- 심사·선정·평가 기준의 공개
- 이해충돌 방지
- 데이터 기반의 성과 공개
- 독립적인 평가 기구
같은 장치를 통해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신뢰가 없으면 기업은 장기 투자를 꺼리고, 국민은 정책을 ‘특정 집단을 위한 지원’으로 인식하며, 결국 선순환이 끊긴다.
무엇을 해야 하나: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을 실행으로 옮기는 체크리스트
정리하면, 목표는 ‘AI 도입’이 아니라 AI와 인적 자본을 결합해 생산성 혁신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실행을 위해 다음 체크리스트를 제안할 수 있다.
- 대학·직업교육의 질적 전환: 문제정의·비판적 사고·프로젝트 학습 강화
- 기업의 AI 전환 지원: 데이터 인프라, 보안, 프로세스 재설계까지 포함한 패키지 지원
- 근로자 재교육과 안전망: 학습 시간/비용 지원 + 전환기 소득·고용 안정
- 성과 연동형 산업정책: 단계적 지원과 엄정한 평가
- 투명성 확보: 정책의 목표-집행-평가-환류 전 과정 공개
이 모든 항목은 따로 노는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묶음으로 연결될 때 효과가 커진다. 교육이 바뀌면 현장이 바뀌고, 현장이 바뀌면 R&D가 빨라지며, 그 성과가 다시 교육과 정책의 개선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맺으며: 2% 성장의 조건은 ‘기술’이 아니라 ‘조합’이다
기조연설이 던진 메시지는 낙관이 아니라 조건부의 현실론이다. AI와 인적 자본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산업정책이 작동한다면, 한국은 저성장의 함정을 벗어나 2% 잠재성장률을 20~30년 이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미래가 아니다.
AI·인적자본 산업정책이 성공하려면, 기술 투자만큼이나 교육의 질적 전환, 전환 비용의 공정한 분담, 성과 중심의 정책 설계, 무엇보다 투명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결국 지속 성장은 ‘좋은 기술’이 아니라 좋은 기술을 사회 전체가 흡수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와 사람의 역량에서 나온다.
이제 질문은 “AI가 경제를 살릴까?”가 아니라, “AI와 인적 자본을 결합하는 정책을 얼마나 정교하고 투명하게 실행할 수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장의 열쇠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성장으로 전환하는 ‘조합’에 있다.
